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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스튜어트는 스코틀랜드의 비극적 여왕으로 종교개혁의 혼란기에 태어났는데, 잉글랜드에도 ‘피의 메리’라고 불리는 엘리자베스의 언니 메리 여왕이 있어 혼동하기 쉽습니다.
기원전 1000년경에 브리튼 섬 북부 지역에 켈트계 픽트인들이 건너와 자리를 잡았는데 로마인들은 이 지역을 칼레도니아라 불렀습니다. 그 후 켈트계 브리튼족, 게르만계 앵글족, 그리고 켈트계 스코트족 등이 유입되었고, 스코트 인들은 다르리아다 왕조를 구축했는데 나중에 스코틀랜드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메리 여왕은 1542년에 스코틀랜드 왕인 제임스 5세의 큰 딸로 태어났는데, 오랜 병상에 있던 제임스 5세는 아들들을 잃어 사내아이를 바랐지만 여자아이가 태어난 것입니다. 그녀가 태어난 해에 제임스 5세는 서른 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는데, 그는 솔웨이 모스 전투에서 패배하고 귀족들마저 등을 돌리자 극심한 신경쇠약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왕권의 시작
이로써 태어난 지 겨우 6일이 된 메리가 즉위하는데 그녀에게는 스코틀랜드 왕실뿐 아니라 어머니의 프랑스, 할머니의 잉글랜드 튜더 왕가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갓난아기인 그녀를 대신해 애런 백작이 1554년까지 섭정을 했으며, 그 후에는 메리 기즈가 추기경 비튼 과 함께 그 역할을 대신했습니다. 그러나 갓난아기에게 주어진 왕권은 재앙에 가까웠는데 스코틀랜드를 노리던 유럽의 왕들은 그녀를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습니다.
16세기 초에 종교 개혁 물결은 스코틀랜드에도 몰려왔는데, 잉글랜드의 헨리 8세는 이혼 문제로 가톨릭과 절연하고, 프로테스탄트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이 때문에 가톨릭 국가들 사이에서 고립당한 헨리 8세는 우군이 필요해졌는데 그런 헨리 8세는 어린 여왕에게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는 그녀를 자신의 아들과 결혼시켜 스코틀랜드와의 병합을 노렸으나 가톨릭교도였던 메리 기즈는 이 결혼을 반대했습니다.
이에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를 침공해 에든버러가 막대한 피해를 입고 많은 궁전과 수도원이 파괴되는 데 이것을 ‘난폭한 구혼’이라고 부릅니다. 간신히 스털링 성으로 피신한 메리 여왕과 기즈 왕비는 메리가 열 살이 되는 해 에드워드와의 결혼을 위해 잉글랜드로 보낸다는 그리니치 조약에 서명해 죽음을 면했습니다. 그런데 헨리 8세가 죽자 메리는 그리니치 조약을 이행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혀 1547년에 다시 핑키 클로 전투가 발발했습니다. 이 전쟁으로 1만 명이 넘는 사람이 죽는 스코틀랜드 대학살이 자행되는데 그녀는 인치마홈 수도원으로 도피했지만 프랑스로 갈 때까지 잉글랜드의 협박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1548년 프랑스 앙리 2세는 메리를 프랑스로 데려오려고, 스코틀랜드에 함대를 파견했는데 메리는 이 도움으로 스코틀랜드에서 프랑스로 옮겨지게 됩니다.
프랑스 황태자 프랑수아와 첫 번째 결혼
프랑스에서 메리는 나름 행복한 날을 보냈는데, 프랑스의 국왕 앙리 2세는 메리가 이어받은 혈통이 이용 가치가 있다고 판단해 메리를 후대했습니다.
아름다운 용모에 총명하기로 소문난 그녀는 프랑스 국민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는데 이 때문에 시어머니인 메디치 가문의 캐서린에게 미움을 사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그녀는 6개국의 언어를 구사했으며 시를 쓰고, 루트를 연주하며, 춤을 잘 추는 등 다방면에서 뛰어난 재주를 드러낸 인물이었습니다.
출중한 미모와 우아함을 겸비한 그녀는 1558년에 열네 살의 프랑스 황태자 프랑수아와 결혼해 황태자비가 되며, 그때 잉글랜드에서는 엘리자베스가 여왕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이에 앙리 2세는 서자인 엘리자베스에게는 왕위 계승권이 없고, 튜더 왕가 혈통인 메리 스튜어트가 적합하다며, 엘리자베스의 즉위를 간섭하고 나섰습니다.
헨리 8세는 엘리자베스의 모친인 앤 볼린과의 결혼을 무효라고 선언한 후 교수형에 처했으며, 엘리자베스도 적자가 아닌 서자라고 공표한 바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맞서 잉글랜드 의회는 엘리자베스의 적출을 결정해 프랑스의 개입을 막았는데 이 사건은 메리와 엘리자베스의 오랜 불화의 발단이 되게 됩니다. 그녀가 결혼한 이듬해에 앙리 2세는 마상 창시합에서 얻은 부상으로 타계하고, 크랑수아가 즉위해 메리는 프랑스 왕비가 되지만, 이 황금기는 얼마 가지 못하게 됩니다.
스코틀랜드에서의 삶
1560년에 병약한 남편 프랑수아가 죽어 열여덟 살에 미망인이 된 메리는 이듬해인 1561년에 스코틀랜드로 돌아갔으며 황금시대는 그렇게 허무하게 끝이 났습니다.
프랑스 궁정 문화에 길들여진 그녀는 스코틀랜드로 귀환한 후 큰 영향을 미쳤는데 홀리루드 성을 프랑스풍으로 꾸미고, 가면극과 연극을 장려해 잉글랜드 연극의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녀의 사치스러운 궁정생활은 존 녹스를 비롯한 청교도 신자들에게 분노와 적개심을 일으켰고, 끝없는 갈등의 요소로 작용했습니다.
메리 여왕이 귀국했을 때, 스코틀랜드는 막강한 실권자들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가장 먼저 주목할 사람은 그녀의 이복 오빠 제임스 스튜어트인 모레이경이었습니다.. 그녀 대신 스코틀랜드의 실무를 담당하던 제임스는 제임스 5세와 스코틀랜드 최고 귀족 가문의 딸인 마가렛 어스카인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였습니다. 그러나 모레이 경은 물려받은 유산과 수도원 토지 해체령을 통해 얻은 영지로 어렵지 않게 스코틀랜드의 실권을 장악했습니다. 그는 메리가 귀환했을 때 조력자로 곁을 지켰고, 그녀의 자리를 탐하지도 않았지만 개신교라 가톨릭교도인 메리와 갈등했고,
메리와 단리 경의 재혼을 반대해 골이 깊어졌습니다. 두 번째로 주목할 사람은 국무대신인 메이틀랜드로 그도 개신교도였으며, 타고난 외교관이었는데, 개인적으로 메리 여왕을 좋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메이틀랜드도 단리 경과 그녀의 재혼을 반대했는데 메이틀랜드와 모레이 경을 중심으로 개신교도들의 세력이 모아지면서 메리 여왕을 위협하는 커다란 존재가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민중들의 지지를 받던 존 녹스는 메리의 귀국 전부터 적대감을 드러냈는데 그는 캘빈주의자로 향락적이며, 고풍스러운 삶을 지향하는 그녀와 대척점에 서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과 메리 여왕은 당시 유럽 전역에서 가장 많은 구애를 받는 여인이었습니다. 여왕과의 결혼이 성사되면 적어도 한 왕국, 잘하면 두 왕국을 모두 자신의 소유로 만들 수 있었기 때문에 각국의 권력자가 앞다퉈 이들에게 결혼을 제의했습니다. 메리 여왕은 자신의 결혼 협상 문제를 모레이 경에게 일임했는데 모레이 경은 그녀를 타국의 왕과 결혼시키면 자신이 실질적인 왕의 역할을 할 수 있어 적극적이었습니다. 반면 엘리자베스 여왕은 강력한 부국과 메리 여왕이 결혼하면 잉글랜드에 위협이 커질 것이 자명해 이들과 메리의 결혼 추진을 반대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엘리자베스는 그녀의 공공연한 애인이었던 로버트 더들리 경과 결혼하라고 메리에게 권하게 됩니다. 메리 여왕은 더들리 경과의 결혼을 위해 제임스 멜빌 경을 런던으로 파견했는데 외교에 능한 멜빌은 더들리 경이 아니라 단리 경과의 결혼을 추진했습니다. 단리 경은 왕도 영주도 아니며, 아버지 레녹스 백작은 토지를 몰수당하고, 스코틀랜드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메리 여왕의 결혼 명단에서 최후의 보루 정도였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메리는 교양을 갖춘 잘생긴 젊은 단리 경을 보자 사랑에 빠졌고, 사촌간인 그와의 결혼을 위해 교황에게 결혼 특례에 관한 편지를 보내게 됩니다. 비밀리에 진행되던 단리 경과 메리의 결혼이 모레이 경화 베이틀랜드의 귀에 들어가자 이들은 가톨릭교도인 단리 경과의 결혼을 강력히 반대했습니다. 특히 모레이 경은 결혼에 대한 전권을 위임한다던 약속을 번복하고 스코틀랜드 내 여왕의 입지와 권력을 강화시키는 인물과 결혼하려는 것에 메리에게 큰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헨리 스튜어트 단리 경과의 두 번째 결혼
모든 대신과 측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메리 여왕은 1565년에 단리 경과 결혼을 하는데, 그녀는 결혼식에 프랑수아 2세의 장례식에서 입었던 상복을 입고 나타나 모두를 놀라게 했습니다. 이 복장은 그녀의 두 번째 결혼이 국가를 위한 결혼일 뿐, 첫 남편에 대한 사랑과 예의를 잃지 않았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습니다. 이 결혼으로 모레이 경은 궁을 떠나 결혼식에 나타나지 않았고, 의회에 출두하라는 소환도 받아들이지 않아 스코틀랜드에서 추방당하는데 이것은 모레이 경의 반란으로 이어졌습니다. 순식간에 결혼식 행렬은 전쟁 행군이 되었고, 단리 경과 메리의 결혼을 경계했던 엘리자베스 여왕은 개신교파 세력과 힘을 합친 모레이 경을 암암리에 지원했습니다. 그러나 급하게 결성된 모레이 세력은 메리 여왕의 군대에 대패했고, 모레이 경은 목숨만 간신히 건져 잉글랜드로 도망치게 됩니다. 하지만 메리 여왕을 근심하게 만든 사람은 자신의 새로운 남편인 단리 경이었는데, 그는 그녀의 사랑과 권력 속에서 나날이 오만해졌고, 정치에 개입하려고 했습니다. 또한 데이비드 리치오와 메리의 관계를 질투하기 시작했는데 메리가 임신을 하자 데이비드의 아이일 것이라고 의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개신교 파는 질투심에 불타는 단리 경을 앞세워 데이비드 암살 음모를 꾸미는데 잉글랜드에 피해있던 모레이 경이 귀환해 메리 여왕을 도와 일단락되었습니다. 1566년에 메리 여왕은 임신 중에 벌어진 반란의 고통을 딛고, 제임스 6세를 출산했는데, 이 아이는 훗날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통합할 군주가 됩니다. 메리 여왕은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단리 경에게 “하느님이 당신과 내게 당신의 아들을 선물로 주셨어요”라고 말해 단리 경의 의심을 일축시켰습니다. 그러나 메리는 출산 한 달 뒤 홀리루드 성을 떠나 알로아로 여행을 떠났는데, 이것은 단리 경에 대한 사랑이 완전히 식었음을 보여주는 행위였습니다.
남편마저 등 돌린 상황에서 메리의 곁을 지킨 사람은 보스웰 경이었는데 그는 메리 기즈 왕비를 끝까지 지키다 모레이 경에게 쫓겨 스코틀랜드를 떠난 강인하고 남성다운 인물이었습니다. 단리 경의 반란진압 총 사령관 직책을 충실하게 이행한 보스웰 경에게 그녀는 추방된 반란자들의 영지를 하사하고, 부유한 헌틀리 가문의 젊은 진 고든을 아내로 골라 주게 됩니다. 그러나 둘은 애정관계로 발전해 빈축을 사기 시작했는데, 보스웰 경이 아프다는 소식에 메리 여왕은 단숨에 그의 성으로 달려갔다고 합니다. 메리 여왕의 적대감을 느낀 단리 경은 제임스 왕자의 세례식에 참석하지 않고, 아버지의 영지인 글라스고로 도망쳤다가 메리 여왕의 권유로 귀환을 하게 됩니다. 그들은 감정을 털고 화해하려는 듯 보였지만, 커크 오필드에서 원인불명의 폭발이 일어나고 다음 날 마당에서는 죽은 단리 경의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그의 죽음에 여러 사람이 의심의 대상이 되었지만 배후는 밝혀지지 않았는데 사람들은 메리 여왕과 보스웰 경의 합작인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보스웰 경은 단리 경 살해 혐의를 받았지만 증거가 없어 풀려났으며, 12명이 넘는 백작, 주교들에게 메리 여왕과의 결혼에 동의해 달라는 협약서에 서명토록 했습니다.
보스웰 백작과 세 번째 결혼
그는 메리 여왕을 던바 성으로 납치해 첫날밤을 보냈고,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렸는데 보스웰 경이 첫 번째 부인이었던 진 고든과 이혼한 지 불과 12일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메리 여왕의 이런 세 번째 결혼은 대내외적으로 강한 반발에 직면했는데 남편의 살해자로 추정되는 자와의 재혼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26명의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이들의 결혼에 반대하는 군대를 일으켰고, 메리 여왕은 이들 군대에 붙잡혀 로클레벤 성에 감금되었습니다. 반란군은 아드인 제임스 6세에게 왕좌 이양을 강요했고, 모레이 경이 혼란을 틈타 다시 섭정의 자리에 올랐으며, 덴마크로 추방당한 보스웰 경은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1567년 그녀는 즉위 24년 만에 폐위를 당해 코크리븐 성에 감금되었고,
단리 경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 1살짜리 제임스가 즉위를 했습니다. 감금된 메리는 이듬해 탈출에 성공해 다시 왕위를 목표로 거병을 했지만 싱겁게 진압이 되고,
잉글랜드에서의 마지막
메리는 잉글랜드로 망명을 하게 됩니다.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는 그녀에게 어떤 조치를 취할지 상당히 고심을 했었는데 메리는 감금 상태에서 이후 20년 가까이 잉글랜드 안을 전전해야 했습니다. 메리는 망명 후에도 잉글랜드의 왕위 계승권은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했으며, 엘리자베스를 폐위시키려는 시도를 계속하는데, 그녀는 어른이 되지 못한 분방한 귀족의 딸이었습니다. 그런 그녀는 1586년에 엘리자베스 여왕 암살 계획에 연루되어 재판을 받게 되는데, 엘리자베스 여왕은 메리의 권위를 실추시키기 위해 모레이 경의 암살에 공모했다는 증거들을 런던에 공개했습니다. 또한 잉글랜드 침략을 계획한 오스트리아 돈 주앙의 음모에도 그녀가 연루되어 있다고 추궁하여 재판 결과 사형이 언도되게 됩니다. 엘리자베스는 사형 집행 명령서에 서명하기를 마지막까지 주저했는데, 메리에 대한 심경을 이렇게 표현했다고 합니다. “애증이 반반이다”.
다음 해인 1587년에 마흔네 살의 메리 스튜어트는 36명의 잉글랜드 궁정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개 처형을 당했습니다. 그녀는 죽음 앞에 초연한 태도를 보였지만, 막상 얼굴을 덮은 천을 벗겼을 때 얼굴은 싸늘하게 일그러져 있었습니다. 혼란 속에서 태어나 분방하게 살아온 비극의 여왕은 현재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치되어 영원한 정적 속에 잠들어 있습니다.
메리 스튜어트의 죽음 이후
메리 스튜어트의 아들 제임스는 어머니의 목숨과 바꾼 왕위 계승권을 이어받아 엘리자베스 1세가 죽은 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영국의 제임스 1세로 스코틀랜드에서는 제임스 6세로 불리기도 하는데 아들인 찰스 1세는 청교도 혁명 시기에 왕의 신분으로서 처형되는 비운을 겪기도 합니다. 메리는 처형을 당할 때 첫째로 프랑스 땅에 묻어줄 것, 둘째로 자신의 뒷바라지를 해준 시종들과 시녀들에게 자신의 유산과 연금을 줄 것, 셋째로 처형은 공개된 장소에서 할 것 등을 조건으로 내걸었다고 합니다. 도끼로 참수되어 고통스럽게 죽었는데 처형집행인이 메리의 잘린 머리를 집어 들었을 때 가발을 잡는 바람에 잘린 머리가 굴러 떨어져서 지켜보던 수백 명의 사람들이 놀랐다고 합니다. 또한 메리의 드레스 속에 있던 작은 반려견은 메리가 사망하자 나와 핏물 위에 누워 애통해했고, 그 후에도 먹이를 거부하더니 이내 죽었다고 합니다.
메리가 사망한 후 1년 뒤에 스페인의 펠리페 2세가 메리의 처형을 명분 중 하나로 삼아 잉글랜드를 침공해 칼레 해전이 펼쳐지게 됩니다. 메리 여왕은 프랑스의 영향을 받아, 왕권이 약했던 스코틀랜드의 실세들과 충돌했기 때문에 존 녹스, 조지 뷰캐넌, 엔드류 멜빌 등 당대 개혁가, 문필가들이 메리에게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그러나 현대에는 종교 분쟁과 왕위 갈등의 희생자로 보는 시각도 생겨났는데, ‘비운의 미녀 군주’로 각종 영화, 티비 쇼 등에서 재조명이 되었습니다. 당대의 미인 중 하나였다고 전해지며 특히 키가 180cm가 넘어 사내들마저 압도하는 엄청난 장신이었습니다.
그녀의 이야기를 다룬 오페라로는 가에타노 도니제티의 마리아 스투아르다가 대표적인데, 엘리자베스와 메리 스튜어트가 만나서 신경전을 벌이는 부분은 이 오페라 최고의 명장면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와 펠리페 2세의 대결을 그린 2007년도 영화 “엘리자베스 : 골든에이지”에서는 사마다 모튼이 메리 여왕을 연기했습니다. 또한 2018년에는 시얼샤 로넌, 마고 로비등이 주연을 한 “메리, 퀸 오브 스코틀랜드”가 개봉되었습니다.가 대표적인데, 엘리자베스와 메리 스튜어트가 만나서 신경전을 벌이는 부분은 이 오페라 최고의 명장면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와 펠리페 2세의 대결을 그린 2007년도 영화 “엘리자베스 : 골든에이지”에서는 사마다 모튼이 메리 여왕을 연기했습니다. 또한 2018년에는 시얼샤 로넌, 마고 로비등이 주연을 한 “메리, 퀸 오브 스코틀랜드”가 개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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